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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
아이히만의 얼굴에서 악을 읽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직접 마주한 그의 언어와 사고는 듣는 이로 하여금 의구심만 자아낼 뿐이었다.
그를 재판장에 섰을 때, 그의 표정과 일관된 항변은 보편적인 죄의식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최종해결책'의 기획자는 그가 한 일에 비해 지나치게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이히만을 세상에 내보이기까지는 피해자인 유대인의 노력이 요구되었다.
그에게서 '악의 평범성'을 목격할 때마다, 유대인들은 지난날의 잔상이 떠올라 괴로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직시해야만 했다.
악의 평범성의 기저에 깔린 사유의 공백을 발견해내야 했기 때문이다.
평범한 얼굴을 한 악은 언제 어디서든 발현될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었다.
영화 '오퍼레이션 피날레'와 '아이히만 쇼'는 아이히만이라는 개인을 통해 인간으로부터 창조되는 악을 재조명했다.
리카르도 클레멘토
아이히만은 책임으로부터 멀리 도망쳐야 했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다다른 뒤, 리카르도 클레멘토라는 이름 뒤에 숨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보국 모사드의 의지는 클레멘토라는 이름의 생명력을 단축시키고야 만다.
그가 아이히만이라는 것을 밝혀내면 긴 시간 이름과 함께 숨어 지내던 죄를 정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아이히만이 되는 순간, 악의 평범성이 본의를 드러내며 모두를 혼란에 빠뜨린다.
오퍼레이션 피날레라는 실제 작전명에 기초하여 창작된 영화는 작전의 긴장감을 넘어서는 것들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아이히만을 이스라엘로 데려오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유대인과 나치 전범이 대면하는 장면을 그려낸다.
전체주의적 사고에 기초하여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아이히만은 모사드 요원들에게 강력한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아이히만의 진실
아이히만과 모사드 요원이 다루는 진실은 상호간의 차이가 명확했다.
아이히만의 진실은 홀로코스트라는 객관적 사실과 별개로 개인의 신념에 의해 판단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전체주의의 메커니즘의 한 부분으로 작동했을 뿐, 죄악과는 무관하다고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체주의 사고가 낳은 파시스트는 전체주의에게로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다.
이처럼 모순된 아이히만의 항변이 그의 입에서 나올 때마다, 유대인 대학살의 현장을 거닐던 그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그를 둘러싼 이데올로기가 객관적 사실과 맞물려 홀로코스트 현장과 재판장을 교차할 때,
진실을 은닉하는 전체주의의 본질이 드러난다.
모사드 요원 피터와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대화에서는 종종 아이히만은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곤 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심판이 죽음으로 귀결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이히만은 사실과 이데올로기를 개별적으로 인식할 뿐,
다가올 죽음의 이유가 사유의 공백이라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하였다.
아이히만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법정에 설치된 카메라는 그의 표정을 잡아내기 위해 일사분란하게 구도를 잡는다.
'기소 법상 저는 무죄입니다.'
일종의 죄책감을 기대했던 바람과는 달리, 일관된
대답과 동요없는 모습만이 아이히만에게 나타난다.
되려 고통의 시간을 지나온 유대인들이 재판과정에서 떠오르는 지난날의 잔상들로 괴로워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직시해야 할 현실이기에 재판장의 카메라는 멈추지 않는다.
이 비운의 역사에 모두가 귀 기울여줄 다시 없을 시간일테니까!
'아이히만 쇼'
청자가 필요한 사람들
'아이히만 쇼'의 개시에는 지난한 과정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촬영 허가와 방송 송출을 위한 설득은 물론,
촉박한 일정까지 더해져 일의 어려움을 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히만 쇼'의 제작진들은 방송을 송출하기 위해 분투한다.
제작자 밀턴과 촬영감독 레오는 '아이히만 쇼'를 제작한다는 목표에서는 이견이 없었으나, 촬영의 방향성을 두고는 의견의 차이를 보였다.
밀턴은 아이히만의 표정에 집착하는 레오의 촬영방식에 불만을 드러냈다.
레오의 촬영방식을 그의 예술관으로 한정하며 '아이히만 쇼' 에서 개인의 목적을 배제하라고 일갈한다.
그러나 레오는 단순히 자신의 예술관이 아닌, 홀로코스트라는 범죄의 기원과 그것이 아이히만을 통해 투영되는 모습을 청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이히만 쇼'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레오의 생각은 타인과의 대화에서도 드러나곤 한다.
체코 난민 출신인 란다우 부인에게 이스라엘에서의 삶에 대해 물을 때, 원래 이스라엘이 아랍인들의 터전이었음을 언급한다.
이는 전체의 염원이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즉, 전체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을 전제로
포스트 아이히만의 등장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그는 조수와의 대화에서 아이히만의 반응을 포착해야 하는 이유를 명확히 드러낸다.
레오는 아이히만에 대한 집착보다 그를 통해 청자들이 갖게 될 전체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우선했던 것이다.
생존자의 언어
가가린의 우주 비행 성공 소식은 인류 역사를 뒤흔들 빅뉴스였다.
그러나 인류는 또다른 발전을 위해 끔찍한 과거에 먼저 귀기울여야 했다.
아이히만 재판에서 생존자 증언이 시작되는 시점은 '아이히만 쇼'의 극적인 전환점이 되주었다 . 실질적인 피해사실이 당사자의 육성을 통해 울려퍼질 때, 공감과 충격이 뒤섞인 반응들이 세상을 메웠다.
이 지점은 영화 속 세계와 현실 세계 양 쪽 모두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사실'이 갖는 힘이 스토리텔링으로서는 물론이고,
세상에 인간의 본질을 내비치는 일로서도 탁월함을 발휘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실제 재판 장면과 영화 속을 교차하며 '사실'의 힘을 극대화시킨다.
아이히만은 사실과 책임을 분리하려고 애썼지만,
그럴수록 사유의 공백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무사유는 이토록 끔찍한 홀로코스트를 인간의 손으로 실행하게 만들었다.
영화 '아이히만 쇼 '는 현실의 관객을 재판 현장으로 초대해 무사유의 결과를 전달한다.
사유의 불을 지펴라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서 '악의 평범성'을 발견했다.
그녀는 악의 평범성이 사유하지 않는 인간에게 발현한다고 설파했다.
앞서 소개한 두 영화는 아이히만을 통해 사유의 공백을 그려내면서 관객에게 사유의 시간을 제공하였다.
'아이히만 쇼'에서 레오는 아이히만이 만들어진 파시스트임을 증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전체주의의 메커니즘이 필연적으로 사유의 공백을 내재함을 알리는 말이기도 했다.
전체주의는 역사 속에 사그라진 불꽃이 아니었다.
그 불씨는 지펴줄 이유가 충족된다면,
인간의 사유의 공백을 불쏘시개 삼아 되살아날 것이다.
영화를 통해 전체주의의 위험성과 그에 수반되는 악의 평범성을 경계하며 사유의 끈을 놓지 않는 날들의 연속이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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