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영화리뷰] '박열과 후미코' 그리고 '유사쿠와 사토코'

칸타빌레유니버스 2022. 1. 29. 15:27

#. prologue

 

시대극 영화를 접할 때마다 왠지 모르게 드라마적인 느낌을 받곤 한다.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만든 영화임에도 분명한데 이런 느낌이 드는 건,

지금 나의 일상과 영화의 시대적 배경 사이의 인터벌 때문은 아닐까?

 

그 시절이 갖는 특수성이 영화 속 캐릭터를 탄생 시켰다면,

동일한 시대의 공기를 마시지 않는 나로선 막연한 공감을 할 뿐이다.

그만큼 시대를 지배한 이데올로기를 체감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굵직한 사건보다 인물 하나하나에게 더 마음이 쓰인다.

 

시대에 내던져진 개인의 모습을 헤아리려는 시도는,

시간의 간격을 넘어서 그저 한 사람에게 공감하고 싶은 마음이 전제된 건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본 두 편의 영화는 시대의 조류 속에 움직이는 개인을 그려낸다.

영화 '박열'과 '스파이의아내' 는  3.1운동 이후부터 태평양전쟁 발발까지 일본의 제국주의의 야만성을 목격하는 시대극이다.

'박열과 후미코' 그리고 '유사쿠와 사토코'는 불완전한 개인이 마주한 시대에 불안의 표상이었다.

제국주의의 음습한 공기는 그들이 매일같이 들이마셔야 했던 현실이었다.

그들이 밟고 있는 땅으로부터 주어진 선택과 신념, 그 안에서 흔들리는 개인은 많은 이야기들을 던진다.

 

#. 나는 아나키스트요

 

 

다테마쓰가 박열에게 일본 말로 묻는다.

"불령사는 사회주의자 단체인가?"

이에 박열이 조선말로 대답한다.

"아니네. 불령사는 아나키스트 단체네"

 

프랑스 사회주의 사상가 프루동이 자신의 저서 [소유란 무엇인가]에서 자신이 아나키스트임을 묘사하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박열은 이렇듯 분명한 아나키스트였고, 결국 자신을 심문하던 다테마쓰에게도 체제에 대한 의심을 선사한다.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체제 유지의 불안을 느낀 일본 정부는 엽기적인 방식으로 조선인에게 화살을 돌린다. 

제국주의 관료들은 조선인 대학살이라는 만행을 주도하면서도, 국제사회에 비칠 제국주의 일본의 모습에 신경 쓰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

따라서 제국주의 일본의 합리성을 국제사회에 공표하고자 박열을 타깃으로 삼아 법정에 세운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것은 되려 자기모순에 빠진 체제의 민낯을 드러내는 트리거가 될 것이라는 것을.

박열은 법정을 스피커 삼아 국제사회에 군국주의의 만행과 아나키스트로서 자신의 신념을 거침없이 펼쳐 보였다.

 

당시 박열과 불령사 조직원들이 기거하는 일본 땅은 군국주의 기치를 내세워 중앙으로 권력을 집중하려는 분위기가 가득했다.

파시즘의 행태가 대개 그렇듯이 힘을 중앙으로 집중시키기 위해서는 '적'과 '표상'이 필요했다.

일본 정부 관료들은 관동대지진의 여파를 수습하기 위해 이러한 파시즘의 메커니즘을 이용하려 들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정부를 향한 분노를 조선인에게 이양시킨 관료들은 미소 지었지만,

조선인 청년 '박열'은 웃을 수 없었다.

 

가네코 후미코와 첫 만남 때 그가 말했듯이,

그는 일본 제국주의를 미워하는 것이지 일본 민중을 미워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따라서 일본 민중을 호도하는 제국주의의 통제와 교육을 향해 온몸을 다해 저항했다.

"천황도 똑같은 인간이야!!"

군국주의의 합리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

아나키스트답게 직접 행동하고 결정하는 면모는 그렇게 분출되고 있었다.

 

군국주의의 폐해는 아래로 향한다.

결국 그 폐해는 개인이 짊어지게 되는 것이다.

일본 민중은 물론이고 제국주의 일본 법정에 서 있는 박열까지.

시대의 겁박이 개인의 삶의 영역을 제한시킨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밀려든다.

문득 박열과 함께 제국주의 권력층을 신랄하게 비판하던 가네코 후미코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 가네코 후미코

 

다테마쓰가 후미코에게 묻는다.

"박열이 당신을 협박하고 있나?"

후미코가 대답한다.

"내가 박열을 협박했다. 말하자면 그의 과외 선생이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의 동지이자 아내로서 그와 함께 제국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아나키스트다.

그녀는 일본 권력층에게 정확한 포커싱을 맞추고 신념을 펼친다.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 특권계급을 지속시키는 근거가 된다는 그녀의 주장은,

그녀가 가진 아나키스트로서의 신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특히 그녀가 법정에서 아나키스트로서 본인의 신념과 제국주의 폐해를 꾸짖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라 할 수 있다.

일본 제국주의를 거침없이 비판하는 후미코를 향해 방청하는 일본인 한 명이 거친 반응을 내보인다.

그러자 후미코는 되려 그 상황을 통해 제국주의가 민중(개인)이 권력층의 이익을 위해 희생되는 체제임을 분명히 역설한다.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직접적으로 행동하는 아니키스트 가네코 후미코.

 

그러나 의도가 어떻든 간에 그녀와 박열은 제국주의 법정 한복판에 서 있고 심판을 받는 입장에 처해있다.

제국주의 국가가 행하는 폭력에 자유로울 수 없으며, 종국에는 죽음에도 이를 수 있는 저항을 선택한 것이다.

만약 군국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박열과 후미코는 개인으로서 좀 더 평범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까?

 

#. 그들이 원하는 영웅이 돼줘야지

 

 

박열과 후미코의 삶은 주체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겨냥하는 권위가 개인의 삶의 영역을 대단히 침범한 것으로도 비친다.

제국주의의 탐욕이 개인이 추구하는 삶의 노선을 제한시켜 버린 건 아닌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박열의 대사 한 마디가 아직도 머릿속에 각인된다.

"그들이 원하는 영웅이 돼줘야지"

 

시대의 그늘이 그에게 드리우지 않았다면 그러한 역할을 자처하진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고통받는 건 언제나 개인이다. 실질적인 고통은 온전히 '나'로부터 체감되기 때문이다.

 


Wife of a spy

#. 진실을 본다는 것

 

일상은 급격히 달라졌다.

바깥세상에서 펼쳐지는 거대한 조류를 인지한 순간부터,

평온한 일상에 대한 거부감이 스며든다.

유사쿠가 '진실'을 목격한 순간과 사토코가 '진실'을 알게 된 순간이 겹치면서 불안은 일상을 잠식해나갔다.

 

군국주의 일본의 야만성은 고베에서 알아차리기 어려운 일이었다.

바깥 세상은 유사쿠와 사토코가 평온한 일상을 영위하던 순간에도 잔인한 폭력에 휩싸이고 있었다.

바깥세상을 직접 목격한 유사쿠가 자국의 만행을 담은 필름을 품고 고베로 돌아온 순간부터 프레임의 전쟁이 시작됐다.

만행을 감추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프레임과 '코즈모폴리턴'으로서 신념을 이행하려는 유사쿠의 프레임이 격돌한 것이다.

이제 유사쿠와 사토코가 머무는 고베는 예전과 동일할 수 없다.

 

제국주의 일본이 숨겨야 할 '진실'을 양산해낼수록, 사토코의 세상도 점층적으로 무너져내린다,

남편의 선택에 동조하면서도 언젠간 들이닥칠 진실의 무게가 일상을 짓눌렀기 때문일 것이다.

유사쿠처럼 자로 잰 듯이 신념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은연중 알게 된 진실과 이로 인해 달라진 일상에 흔들리는 사토코가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유사쿠와 사토코는 자신의 세상을 파괴당하는 측면에서 동일선상에 있다고 보인다. 

유사쿠가 배를 타고 고베를 떠나는 모습과 사토코가 화염에 휩싸인 자국 땅에서 통곡하는 모습은,

관계의 파괴와 단절로 점철된 개인의 파괴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시대를 지우고 개인을 남겨두었을 때,

박열과 후미코, 유사쿠와 사토코는 어떤 사람일까?

사건보다 사람에게 마음이 쓰이는 것.

그것은 시대극이 다다르는 지점이 결국 사람을 향한 마음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