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pproach
미친 세상이라고 일컫는 시대였다.
제국주의의 욕망은 전쟁을 통해 한 풀 꺾였지만, 그 후유증으로 낳은 불안 증세는 유럽을 맴돌았다.
빈곤의 고통은 나치즘 따위를 불러냈고,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 곧 윤리가 되는 혼돈의 시절이었다.
분명한 것은 모두가 선택의 문제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현실이지만 모두가 같은 선택을 하진 않았다.
진실을 가공하는 쪽을 택한 이들은 대의나 명분을 핑계삼아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진실을 직면하는 쪽을 택한 이들은 직접 본 것을 전달해내겠다는 의지를 엿보인다.
뉴욕 타임스의 월터 듀란티와 로이드 조지의 전 외교고문 존스는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들이었다.
스탈린을 매개로 조우한 그들은 사실에 대한 상반된 태도를 보이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전 세계가 경제난에 허덕일 때, 소비에트는 돈을 쓰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스탈린의 황금은 시대의 안티테제로써 자리 잡아가는 듯 보였다.
히틀러를 인터뷰한 존스는 그에게서 새로운 전쟁의 도래를 직감했는데, 이는 스탈린과의 만남을 서두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소비에트의 약진에는 여전히 의구심을 자아내는 요소가 상존했는데, 이를 풀어낸다면 나치즘의 광기를 소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윽고 모스크바행 열차를 올라타는 존스의 모습에서 조지오웰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행동하고 기록하는 작가 오웰, 사실을 찾아 나서는 가레스 존스.
시대가 혼란스럽기에 진실을 찾는 일은 숭고하기 이를 데 없으나, 눈앞에 나타난 진실은 때때로 뼈아픈 법이다.
오웰과 존스가 목도하는 진실은 상상과는 다르기에 기록의 욕구를 상승시킨다.
존스가 모스크바에서 듀란티와 마주한 순간, 오웰의 저작 [동물농장]의 모티프가 아른거리기 시작한다.
은폐된 진실에의 접근이 마침내 시작된 것이다.
#. holodomor
파시즘을 추체험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듀란티의 입을 통해 파울 클레브의 죽음을 전해 들었을 때, 겪어본 바 없는 빅브라더의 잔상이 존스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듯했다.
파울 클레브는 존스를 히틀러와 대면시킨 장본인이자,
모스크바에서 새로운 소스가 있음을 알려온 기자였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석연치 않은 뉘앙스를 자아냈다.
사실에의 통제는 소비에트 체제에서 공공연한 일인듯 했다.
더욱이 찝찝한 것은 월터 듀란티의 존재일 것이다.
그는 사실을 취급하는 일을 하지만, 스탈린의 그늘에 서있는 그에게서 퓰리처상의 위용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황금에 대한 의구심은, 파울 클레브의 죽음과 함께 우크라이나로 향한다.
흑토 지대, 집단농장의 효율성.. 스탈린의 황금을 수사하는 말들은 체제의 모순 앞에서 의심을 들끓게 했다.
빅브라더의 눈을 피해 우크라이나로 입성하는 일은 결코 쉬운 결단은 아니었다.
그러나 진실에의 추종은 조지 오웰과 가레스 존스에게
사라져가는 객관적 사실을 수호하는 사명같은 일이었다.
사실을 가공하는 일은 고통받는 이들을 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존스가 우크라이나에서 본 것은 비옥한 흑토지대가 아닌 빅브라더의 착취와 피지배층의 울부짖음이었다.
'THE TRUE OFTEN HURTS'
영화를 통해 묘사되는 진실은 괴롭기 그지없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사이의 관성의 법칙은,
이 땅에 드리운 혁명의 본질을 되묻게 한다.
그곳에 위대한 실험은 없었다.
다만 죽음에 익숙해지는 정서만이 자욱했다.
전체주의가 습관처럼 내뱉는 대의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대의라는 장치가 주는 명분만이 존속되길 바라는 동물농장의 돼지와 사냥개만이 미소 지을 뿐이었다
#. forwarding
어디에나 진실이 달갑지 않은 사람은 존재하는 법이다.
그래서 진실을 경험하는 일은 모두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기억을 조작하는 일 따위는 사라질 테니까.
이 지점에서 존스와 오웰은 동일선 상에 있었다.
인간이 객관적 사실을 부정하면 디스토피아는 언제고 들이닥칠 수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조지 오웰은 그의 일생에 펴낸 수많은 저작을 통해,
가레스 존스는 홀로도모르의 실상을 담은 기사를 통해 기억의 지배와 디스토피아의 도래를 경계했다.
물론 사실을 전달해도 현실은 변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사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지 않기 위해 기록은 지속된다.
조지 오웰의 마지막 저작 [1984]에서 윈스턴 스미스가 텔레스크린 사각지대에서 일기를 써 내려 갔던 것처럼,
영화 [미스터 존스]는 기억하는 일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기억을 지배당하는 순간, 삶의 주체는 뒤바뀌어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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