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ologue
1960년대 미국은 격동의 시기를 걷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암살'과'전쟁'은 시대가 제시한 합리성에 의문점을 낳는 키워드였고, 곧 거센 저항의 물결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비단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는, 기존의 권위에 저항으로 답하는 움직임들이 이어졌다.
냉전, 자본주의, 사회주의.. 포스트 파시즘을 대변할 만한 것들이 스스로 결점을 드러내면서, 기존의 질서에 대한 의심을 자아낸 것이다.
새로움을 외치는 이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이에 대한 국가의 대답은 폭력을 통한 통제였다.
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파시즘과의 대결에서 승리했다는 기쁨은, 또 다른 모습으로 출현한 폭력의 등장에 자취를 감췄다.
작금의 질서에 의문을 제기했을 때, 돌아온 대답이 폭력이라면 혁명은 멈출 수 없었다.
'혁명가를 죽일 수는 있어도 혁명을 죽일 수는 없다.'
프레드 햄튼의 단호한 외침은 자신의 운명과 결부되어 더욱 강력한 목소리로 승화되었다.
'세계가 보고 있다.'
'시카고 7'의 재판을 향한 세계의 시선은 본질적인 저항의 흐름을 무시하는 국가에 대한 경고 문구였다.
'언론은 통치자가 아닌 국민을 섬겨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연하지 않을 수 있었던 시대의 현실을 보여주는 이 문장은, 영화 < 더 포스트> 속 판결문 내용 중 한 문장이다.
'차별과 억압'이 '진실과 새로움'으로 대체되길 바라는 소망은 개개인을 향한 포커싱으로 이어진다.
시대의 흐름 속에 부각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며, 결코 완전할 수 없는 인간의 면면을 따라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인물들에게 묘한 동질감과 공감의 감정이 시대적 경계를 허물고 있다면, 영화의 메시지는 분명 한 걸음 다가와 있을 것이다
#. Judas and the black Messiah
FBI 초대 국장 에드가 후버는 미국 내 반체제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감시하는 조직에 정보원을 투입하여 정보를 얻는 작전을 구사했다.
일명 '블랙 메시아'의 출현을 막기 위해 '유다'를 투입하여 내부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흑표당(black panther party)의 일리노이 지부장 프레드 햄프턴이 커뮤니티에 친화적인 정책으로 영향력이 커지자,
이를 우려한 후버 국장은 햄프턴을 작전의 타깃으로 삼고 '유다'로 선정된 윌리엄 오닐을 투입한다.
오닐은 총을 들고 다니지 않는 차량 절도범이었다. FBI를 사칭해 흑인들로부터 차량을 훔쳐 오던 오닐은 총보다 배지의 힘을 믿는 사람이었다.
절도죄로 인해 자신이 사칭하던 FBI와 조사실에서 직면한 오닐은 형량 대신 '유다'의 역할을 이행할 것을 제안받는다.
배지의 힘을 일찍이 인지한 오닐이 '유다'의 역할을 받아들고 흑표당 내부로 잠입한 순간,
프레드 햄프턴의 행보가 오닐의 시선을 통해 스크린에 투영된다.
프레드 햄프턴은 소외된 민중에 스며드는 커뮤니티 친화적인 정책과 카리스마 있는 연설 실력을 통해 영향력을 키워나간 인물이다.
그는 연대를 통해 작금의 차별에 대항해야 된다고 믿었기에, 크라운 갱단과 무지개 연합 등 연대를 위한 시도도 지속한다.
이러한 햄프턴의 행동들이 소외계층에게 현실이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줄수록, FBI는 블랙 메시아의 출현을 막기 위한 모략도 심화되어 간다.
오닐은 '유다'였기에 햄프턴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런 만큼 햄프턴의 일면을 정확하게 목격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정보원의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햄프턴의 사상에 감화되는 듯한 모습을 내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오닐에게 주어진 역할은 '유다'이기에, 종국에 그는 선택을 해야 될 것이다.
'유다'가 향할 선택지는 일견 정해져 있는 듯하다. 그래서 오닐은 괴롭고 양심에 대한 판단은 유예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닐의 현실에 가까운 것은 배지의 힘이다. 배지의 힘을 외면할지, 양심의 울림을 외면할지는 시대가 오닐에게 선사한 판단의 몫이다.
햄프턴은 주목받기에 더욱 위험했다.
그 또한 선택의 순간들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혁명가는 죽일 수 있지만 혁명을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앞날을 예견한 듯한 연설은 누군가를 감화시키도 하지만, 누군가는 불안에 떨게 할 발언이었다.
언제나 고통에 제일 근접해있는 것은 개인이기에, 대의를 위한 선택이 언젠간 개인을 위한 선택으로 변질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개인의 고통을 감내하고 민중을 선택한 그의 모습에서 시대의 겁박은 원망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프레드 햄프턴과 윌리엄 오닐에게는 국가가 부여하는 '공포'가 동일하게 작용한다.
그리고 극명하게 대비를 이루는 둘의 선택은,
영화의 초반과 말미에 나오는 오닐의 인터뷰 영상을 통해 여운을 남긴다.
살아남은 오닐이 살아남지 못했던 건 '유다'의 결말이었던 걸까?
#. The Chicago 7 & Washington post
진실은 항상 저 너머에 있는 듯했다.
이른 바 '시카고 7이'라고 명명된 이들이 재판정에 설 때도,
펜타곤 페이퍼를 입수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언론의 모습이 비칠 때도,
명분 없는 전쟁의 실체를 은폐하려는 제스처가 소리 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진실을 일컫는 닉슨의 목소리는 테이프에 고스란히 담겨 권위의 쓸쓸한 퇴장을 예고했다.
또한 에비 호프만이 '정치재판'이라고 표현한 시카고 7의 재판은 항소심을 통해 본래 재판의 모습을 찾는 듯했다.
펜타곤 페이퍼'와 '베트남전 사망자 명단'은 명료한 진실의 기록이었다.
그러나 진실이 특정한 층위의 권위를 대변하는 수단으로서 여겨지는 순간,
진실을 담은 서문은 공적인 압박과 조직적 은폐에 가려지기 일쑤였다.
진실이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개인은 수많은 선택 앞에서 내적 갈등을 겪는다.
갈등을 유발하는 건 시대의 정서가 될 수도 있고 개인의 안위 문제일 수도 있다.
워싱턴 포스트 최초의 여성 발행인 '캐서린'은 직업적 편견과 공적 압박을 견뎌내야 했고,
'시카고 7'으로 명명된 학생들은 줄리어드 판사의 권위를 직면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개인은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 애쓰고 진실은 모습을 드러내고야 만다.
트라이얼 시카고 7의 한 장면이 머리를 스친다.
컨실러가 바비 씰에게 프레드 햄프턴의 사망 소식을 전할 때,
바비 씰이 컨실러와 동행한 톰에게 던지는 질문이 인상적이다.
권위에 대한 저항의지를 묻는 그의 모습과 프레드 햄프턴의 죽음은 선택과 결과 앞에서 초연해지는
개인을 그려낸다.
더 포스트는 숱한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펜타곤 페이퍼를 기사화함으로써,
벤과 캐서린의 선택과 결과를 관조해낸다.
결과는 펜타곤 페이퍼를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개인의 선택은
갈등을 온몸으로 견뎌낸 고통의 흔적이었다.
역사는 진실과 선택을 개인에게 던져주며 또 다른 역사를 기록해나간다.
이는 1960년대 미국의 역사적 사실이 현대에도 유효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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